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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이야기] 조조는 정말 악당이었을까?? 조조의 혁신적인 업적들

삼국지 이야기

by 하이(hi)스토리(story) 2021. 4. 1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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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이야기] 조조는 정말 악당이었을까?? 조조의 혁신적인 업적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삼국지의 대표적인 악역, 악당으로 나오는 조조의 혁신적인 업적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조조는 그 당시에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들을 시행하는 등 많은 업적들을 남겼는데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정치적 업적

조조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과 이각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20여 년 동안 안정시켰던 건 큰 공헌이다. 동탁은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조조는 어쨌든 동한 말기 막장이었던 사태를 수습하고, 환령(중국 한나라 시대 황제였던 환제와 영제시대를 뜻함) 이래 동한의 암덩어리였던 환관과 외척 집단 일소를 완성하여 광무제가 육성해놓았던 사인층의 염원을 실현한 바 있었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전략가로써의 업적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만으로도 격조를 높였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달아놓은 주석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물론 클라우제비츠 앙투안 앙리 조미니 마냥 전술 이론에 밝은 사람이 명장취급을 다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조의 경우 행보로 그의 병법 응용을 확실히 보여줬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조조가 주석을 달 수 있었던것이다. 단순 지식만 있었던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걸 오늘날 우리가 봐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한 자신의 경험들과 지식을 베이스로 한 조조의 병법에 대한 조예는 무시할 게 못 된다.

반면 조조의 행적이 손자병법의 주요 사상인 총력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전략가로서의 조조를 그리 높게 보지 않는 경향도 있으나, 국가의 정상적인 군사동원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전략을 제시한 손자병법과, 거병 초반엔 친인척과 지인들만으로 이뤄진 작은 기반을 가지고 시작한 군벌이었고 말년까지도 체제 내에 상당한 반대파가 있어서 총동원에는 한계가 있던 조조의 군사적 경험이 합치하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은 해야 한다. 조조가 당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였고 그런 자신의 깨달음을 조리있게 서술할 문필적 재능도 대단했던 걸물이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순 없다.

 

둔전제 시행

조조의 정치 능력의 진수는 임기응변과 현실성, 유연성, 그리고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에 있다. 동시에 일반 민중들의 피해에는 무심한 경향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 종전의 둔전은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해 전란으로 황폐해진 땅의 생산량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둔전의 확대 과정에서 강제이주와 엄벌같은 강압적인 방식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거나 도주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또한 둔전민은 일반 농민에 비해 천대받았다.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세율은 수확의 50%, 관의 소를 빌릴 경우에는 60%라는 가혹한 것이었다. 기반은 마련해주는 대신 먹고 사는 정도만 보장해주는 제도였기에 유랑민이라면 모를까, 전란에서 비껴나있는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더 손해인 제도였다. 일부 학자들은 부패만 없으면 이게 더 낫다는 주장을 하지만, 한나라의 기존 세제 쪽이 오히려 부패가 없으면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덜하다. 오히려 둔전제가 부패할시 백성들에게 피해가 덜가는거지 단순하게 따져서 부패로 수확의 30% 정도를 추가로 빼앗기더라도 둔전제보다는 기존 세제가 백성들 손에 남는 것이 더 많다. 게다가 둔전제가 특별히 부패를 저지르기 어려운 장치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조조 대에는 이런 것을 임기응변으로 회피했으나 위나라 말기 조방 대에 접어들어서는 조상 일파가 사유화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로 이외의 수탈이 늘어나기에 이른다. 결국 둔전제는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대에 폐지된다. 이 여파는 진대에도 남아서 이때에 이르면 부세가 이미 농민 소득의 절반 가량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토지에서 거둔 농산물의 25%만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시절에 부세가 1/15였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둔전제는 단기적으로 조조의 세력을 급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조조는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 그에따른 이득을 최대한 뽑아네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위나라의 전체적으로 봤을때 우위를 지탱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조의 전략적 우위가 확고해진 것은 하북을 평정한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원소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물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도대전 당시에는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는 기록도 확고히 존재한다. 또한 단지 기록에 자세히 남지 않았을 뿐, 원소를 비롯한 많은 군웅들도둔전제 못지 않은 나름의 내정 정책을 펼쳐서 경제력 향상을 꾀했다는 것은 기록이 많이 남은 유비와 손권의 예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과거에는 둔전제가 경제적 체질을 강화했다는 식의 과대평가가 있었으나 이는 논란이 있다. 둔전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둔전은 고작 40년만에 폐지된다. 심지어 조조 생전에도 이미 백성들이 둔전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반발이 극심했다. 천년동안 중국의 토지 제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북위/수/당의 균전제, 조용조는 둔전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으며, 균전제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모든 땅을 공유지(公有地)로 삼고 백성에게 고르게 경작지를 나누어주고 세금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사실상 자신의 땅이 없는 강제노동에 가까운 둔전제와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둔전제는 여러가지 말이 많으나, 확실한 것은 시행을 통해 조조는 병사들의 민간인 식량약탈을 막는 효과 또한 거둘 수 있었다.

 

구현령 시행

이른바 유재시거, 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 있다. '불인불효' 해도 능력만 있으면 뽑겠다는, 도덕성과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 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친목/인맥빨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공직자를 등용하는데 있어 장래를 생각한다면 능력과 도덕성은 떨어뜨릴수 있는게 아니다. 공직자가 도덕적이지 않은데 능력만 있다면 오히려 더 해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재시거가 애초에 거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진짜 도덕성과 능력인지도 의문이다. 인재의 명성과 도덕성이라는 건 기존의 관리들이나 지방 호족들에게 얼마나 알려졌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 조조가 유재시거를 주장한것은 이제부터 관료 등용을 추천에 의존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조조 자기 의중대로 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결국 구현령은 실제로는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 의도가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 또한 구현령은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는 어떤 시대에나 그렇듯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재능보다 덕이 부족한 인재가 더 널렸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유력가의 추천'을 받는 인재가 발탁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조마저도 그러한 시스템의 한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만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인재나,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인재들이 적지 않아 광폭한 인재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의 지위를 얻으면서 점차 인재풀이 고착화 되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조조가 만든 시스템에도 허점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위 말에 호족세력이 발호한 것은 종친을 배제하는 대신 호족들로 땜빵한 조비와 조예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조비가 황제를 칭할 때 호족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던 게 과연 우연일까. 그것보단 조비가 호족에게 기댈수 밖에 없도록 조장한 조조의 책임도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조식과의 후계자 경쟁에서든 호족세력의 확장에서든 간에.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시대에 이미 기존의 호족 집단에서 공신 계층을 이루면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고위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성립 이후에는 더욱 더 명문가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고, 예외적인 사례는 등애 정도만 남게 된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시대 중국 정치계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문벌'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계통부터 청류와는 거리가 멀어 미묘한 측면이 있었던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된다. 조예 이후의 조상 정권에서는 조씨, 하후씨와 인척들이 모여서 정권을 형성하고 귀족들과 대항하게 되지만,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

허나, 아무리 능력있는 자만 살아남는 난세의 시기이고, 실효가 있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곤 하지만, 공표했다는 사실 만으로 큰 상징성이 있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그랬다지만, 어쨌건 조조는 많은 항장들과 가후 사례와 같이 과거를 신경쓰지 않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한 황실이 기울때까지 자기 세력만 불렸던 청류파를 크게 견제하였다

 

원호법 시행

조조는 관도대전 그리고 적벽대전과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영을 내려 싸움에서 죽은 장병들에게 자손이 없으면 친척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또한 조조는 그 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고 밭갈이 소를 주었다. 나아가 각 고을에는 학교와 선생을 두어서 죽은 장병들의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장병들을 위해 묘당을 지어 제사가 이어지게 도왔다. 이렇듯 조조는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것을 명하는 체계적인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오늘날 보훈제도와 일맥상통하는 이 제도는 조조가 세계최초로 실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상으로 조조의 대표적인 업적들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러한 업적만 보면 조조는 과연 악인인가?

하는 생각보다는 혁명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조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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