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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로를 단축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 수에즈 운하

재미있는 역사사실

by 하이(hi)스토리(story) 2021. 4. 4.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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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로를 단축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 수에즈 운하

최근 선박 한척이 수에즈 운하에 좌초되어 폐쇄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요, 오늘은 바로 수에즈 운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수에즈 운하 개요
수에즈 운하는 1869년에 완공된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로, 이집트 영토를 가로지른다. 전 세계 해운업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고 합니다.

 

수에즈 운하의 필요성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나아가기 위해선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 →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 → 아프리카 대륙 남쪽 희망봉에 도착 → 인도양 도착 → 목적지 도착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배가 아프리카 대륙을 도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리며, 희망봉 남단을 돌아가는 항로는 바다가 매우 거칠다고 합니다.(여담이지만 희망봉이라는 뜻 유래가 희망봉이 보이면 항해하는데 있어서 희망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수에즈 운하 지역을 보면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자리의 폭은 굉장히 협소할 뿐더러 북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이어집니다. 즉 수에즈 운하가 있다면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바로 인도양으로 갈 수 있어 시간과 자원을 크게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에즈 운하의 건설

오늘날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라는 사람이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메흐메트 알리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느꼈고, 우호적인 관계였던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자금확보 차원의 주식을 공매하였습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라는 프랑스 외교관이었습니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양도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운하 건설은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는에됴,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천 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습니다. 기타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감히 프랑스가 영국의 세계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것을 가만 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드 파샤에 대한 직접적 압력은 물론이고, 형식적으로 이집트의 지배자인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도 압력을 넣었으며 수에즈 회사의 주식구입 권유도 단칼에 거절하고 다른 나라들이 해당 주식을 사는 것도 불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당대 최강 대영제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다른 나라들(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등등) 이 수에즈 회사 주식 구입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17만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 쓰게 되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방법으로 건설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회사이며 이집트 소유이고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은 영국 해군함정 HMS 뉴포트(Newport)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함정은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데요, 운하 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슬릴까 봐 뭐라 항의도 하지 못했다고합니다. 


영국의 수에즈 운하 지배

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만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거기서 프랑스는 참패하고 맙니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를 가진 이집트 정부였으나, 이집트 정부의 최대 스폰서는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래서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영국이 견제를 한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 때문에 수에즈 운하를 적극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뒤를 이은 프랑스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프로이센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기고, 또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사이드 파샤는 눈앞에 닥친 재정 폭탄을 피하고, 또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보유 지분 17만 주를 통채로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시장에 내놓은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 주를 통째로 매입한 곳은 바로 영국 정부였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했는데요 경제적으로는 당연히 인도,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크게 단축되는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유사시 인도와 중국에 최대한 빨리 군사력을 투입할 수단이 필요해진 것이었습니다. 다만 앙숙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를 지었고 그 운영에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전쟁 여파로 프랑스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고, 수에즈 운하가 프랑스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영국은 즉시 지분 확보라는 방법으로 운하 운영권을 노린 것이다. 이는 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주도했습니다. 이렇게되어 수에즈 운하의 실질적인 소유는 영국이 하게 됩니다.

이집트로 소유권 전환

1922년 이집트는 형식적으론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파루크 왕조는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는 계속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2차대전 이후 이집트 정부는 주식을 일부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운하를 통제하였습니다.

하지만 1952년 반영 노선을 표방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에 유화적이던 파루크 왕조를 무너뜨렸고, 내부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56년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습니다. 이에 수에즈 운하를 빼앗길 생각이 없었던 영국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전쟁 결과 소련 및 기타 중동국가들의 도움과 소련의 중동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우려한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는 전쟁에서 졌지만 수에즈 운하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으로 서방 세력의 주도권을 완전히 미국에게 빼앗겼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해서 아랍권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이집트는 사실상 중동의 맹주가 되게 됩니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 운하가 폐쇄되기도 했으나,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수에즈 운하

2008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아덴 만 일대에 지나가는 상선을 노리는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고 있지만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해적질이 더욱 기승을 부려 보험료 할증이나 보안업체 고용비용 같은 부가비용이 급증한다면 수에즈 운하 통행을 포기하는 선주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최근에는 소말리아 해적의 활동이 위축된 반면에 서사하라 일대의 해적질이 급증하여 희망봉 우회가 반드시 안전한 루트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세계의 해운업계와 무역업계가 부담한 추가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했는데요,. 현재의 달러 가치로 하면 매년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는 계산이 됩니다. 또한 2011년 한 해 동안 여기를 통과한 배만 해도 2만 2183척에 달했고 통과료로 받은 돈만 해도 54억 1천만 달러에 달해 이집트의 경제적 바탕이라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배들이 늘고 있다. 유가하락과 운하 이용료 상승으로 아프리카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직원들의 횡포가 심각한데, 기념품을 강매하거나 세금을 부과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배들이 이를 견딜 수가 없어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수에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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